그가 저주하게 버려두라

2018.10.28 12:34

chihyun 조회 수:78

그가 저주하게 버려두라

(사무엘하 16:5-13)

 

1. 다윗이 왕 위에서 쫓겨났습니다.

다윗이 압살롬에게 쫓겨 도망가던 그 순간에 그를 저주하던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 사람은 사울 임금의 친족가운데 한 사람이었던 시므이였습니다. 그는 다윗을 향하여 돌을 던지며 피를 흘린 자여 사악한 자여 가거라 가거라”(7)하고 저주하였습니다. 그는 사울왕조의 패망이 다윗의 역심과 반란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굳게 믿었던 것 같습니다. 사울의 가문에 속한 자신의 출세와 영달이 끝이 난 것도 다윗 때문이라는 생각에 매일 울분을 갖고 살았습니다. 그러다 다윗이 아들 압살롬에게 쫓겨 망명길에 오르니까 그 길가로 나와 덩실덩실 춤을 추며 화풀이를 하게 됩니다. 자기 가문의 몰락을 사람에게 돌리며 분노의 삶으로 일관하는 것이 과연 합당한지 돌아볼 대목입니다. 분노는 미련한 자의 것이며(5:2), 우리를 죽이는 육체의 욕심일 뿐입니다.(5:20)

 

2. 그러나 다윗은 그 저주를 묵묵히 받았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아들로 인해 마음이 찢어지는 아픔을 안고 부리나케 도망치는 다윗에게 시므이의 저주는 분노를 일으키기에 충분했습니다. 옆에서 다윗을 수종하던 신하들과 장군들과 백성들은 더더욱 분개했습니다. 아비새 장군이 참다못하여 칼을 빼어 들고 다윗에게 말했습니다. 내가 건너가서 그의 머리를 베게 하소서”(9) 이런 상황에서 우리는 어떻게 했을까요? 다윗은 충분히 그리하라고 명령할 수 있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아비새와 모든 신하들에게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내 몸에서 난 아들도 내 생명을 해하려 하거든 하물며 이 베냐민사람이랴 여호와께서 그에게 명령하신 것이니 그가 저주하게 버려두라”(11)

다윗은 그의 저주를 이해해주었습니다. 아들은 욕심 때문에 아버지도 해하려는데 시므이는 억울한 감정 때문에 하는 것이 아니겠느냐 한 것입니다. 이것이 다윗에게 본받아야 할 관용심입니다. 상할 대로 상한 다윗의 마음속에 이런 포용의 정신이 있다는 것이 놀랍습니다. 그의 신앙의 깊이가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를 알 수 있는 이야기입니다.

 

더욱 놀라운 것은 시므이가 한 번 만 저주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분노를 접고 오히려 시므이를 피해 묵묵히 길을 가는 다윗을 따라오며 시므이는 계속 저주했습니다. 다윗과 그의 추종자들이 길을 갈 때에 시므이는 산비탈을 따라가면서 저주하고 그를 향하여 돌을 던지며 먼지를 날리더라”(13) 다윗이 힘이 없는 것도 아닙니다. 그런데 시므이는 지속적으로 약을 올리고 화를 돋우고 있습니다. 한 번도 아니고 여러 번이 아니겠습니까? 우리 같으면 튀어 나올 불같은 분노가 다윗에게선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의 평정심은 대단했습니다. 적군이 쳐들어오는데도 두려워 아니한 다윗의 평정심은 머리 끝 까지 올라온 분노도 평정심으로 다스리고 있습니다.

제자들은 물결이 높이 치솟을 때 두려움에 평정심을 잃었습니다.(8:25) 일부의 제자들이 예수의 사랑을 독점 하고자 할 때에 모든 제자들은 하나 같이 분개했습니다.(19:24)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의 분노는 얼마나 시시한 것이며 또 얼마나 쉽게 일어나고 있습니까? 성경은 우리의 관용을 다른 사람에게 보여주라고 명령했습니다.(4:5)

 

3. 다윗은 하나님의 긍휼을 기대했습니다.

다윗은 힘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무력한 사람의 행동을 했습니다. 그 이유가 있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혹시 여호와께서 나의 원통함을 감찰하시리니 오늘 그 저주 때문에 여호와께서 선으로 내게 갚아주시리라”(12) 그는 하나님의 선하심을 믿고 있습니다. 자신이 목동으로 양들을 세심하게 살펴보고 조치하듯, 왕으로 사람들의 잘 잘못을 분별하여 처결하듯 하나님이 자신의 원통함을 인정하실 뿐 아니라 보상해주실 것도 내다보고 있는 것입니다. 욥은 억울함을 호소하면서도 그 억울함이 사람에게서 온 것으로 보지 않고 하나님에게서 온 것으로 보았습니다.(19:6), 요셉도 형제들에게 당한 억울함을 하나님의 깊으신 계획과 섭리로 깨달았습니다.(45:5) 다윗도 억울했지만 사람을 향하여 분을 내지 않고 하나님의 자비를 바라보았습니다. 이것이 믿음이 아니겠습니까? 그는 하나님의 자비를 경험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기에 자비를 받을 수 있는 자리에 서 있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하나님의 자비를 경험할 수 있는가? 자비를 베푼 사람입니다. 선한 사마리아 인처럼 강도 만난 사람을 보살펴 주는 자비도 자비려니와 원수를 용서하는 자비는 더 큰 자비 아니겠습니까?(12:7;18:22)

우리는 이유 없는 욕설과 저주를 퍼붓는 사람들을 만나게 됩니다.(69:4) 그의 저주와 욕설을 내버려 둬보십시오. 살아계신 하나님께서 어떻게 일을 결정지어가시는 지를 볼 수 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