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 학교를 통해 다시 만나는 나의 아버지께

2012.07.01 11:45

안현애 조회 수:1325

여덟살에 아버지를 잃은 소년이 있었습니다.

당시 소년의 어머니는꽃 같은 스물여섯 ....소년은 엄마가 자신을 버리고 재혼해 떠날까봐 밤마다

어머니의 신발을 방안에 숨기고야 잠이 들었다고 합니다.

 

해방이 되고 고향인 평양에 더 이상 살 수 없게되자 온 재산을 남겨두고 어머니의 손을 잡고 3.8선 이남으로 내려오면서....

급 할때마다 어머니의 반지 하나, 비녀하나.등등을 빼어 주며 .....

세상에선 돈이 없으면 목숨부지 하기도 어렵다는 것을 배웠다고 합니다.

남한에 내려와 인천 근처에 남의 집 방한칸을 마련 했지만 세상 고생 모르고 살아 오신 어머니를 대신해 수인선 기차 안에서

복숭아를 파는등 소년의 힘으론 견디기 어려운 행상을 해가며 어머니와 자신의 생활을 책임 졌다고 합니다.

또래 아이들은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상급 학교에 진학했지만 소년은 중학교 1학년을 다니다가

두식구 입에 풀칠하기위해 그만 두어야 했답니다.

 

초등학교 시절 몇번 가 보았던 교회 주일 학교에서 알게된 예쁜 소녀,,.....

서울로 통학하는 기차 안에서 학교에 등교하는 그 소녀를 보면 마음이 뛰었지만

껌팔이, 복숭아 장수인 자신의 행색이 부끄러워 외면하며 피했다고 합니다.

그 마음을 소녀는 알았는지 ....소녀는 쑥스러워 하는 소년의 복숭아 자판 위로

깨끗하게 필기된 노트를 날마다 놓고 갔답니다.

소년은 그 노트를 열심히 필기하며 공부하는라 밤을 새우고요.

 

전쟁이 일어나자 ....다시 엄마의 손을 잡고 남으로 피난하던 소년은 ....우연히 미군 지프차 옆을 지나게 되었고

발이 부르터 더이상 걷지 못하는 어머니를 위해 중학교 다닐때 잠깐 배운 영어를 동원하여 손짓 발짓으로 사정하자

귀엽게 여긴 미군의 배려로 부산 까지 미군 지프를 얻어타고 갈 수 있었고

부산에서도 말도 잘 안되는 영어를 써가며 장사를 하며 생활 할 수 있었답니다.

 

학교도 혼란기 서울에서 임시로 내려간 중학교에 적을 올리고 몇 학년을 뛰어 넘어 공부하고 전쟁이 끝난 후에는

서울에 있는 본교에서 자연스럽게 졸업장을 딸 수 있었답니다.

원래 총명했기도 했지만 배움에 목말라 했던 소년은 오히려 다른 아이들 보다도 더 공부를 잘 했고

학교 규율부장등 임원을 맡으며 총망 받는 청년으로 성장해 갔습니다.

노트필기를 자청하여 빌려주었던 소녀와는 둘다 아직 학생이던 대학교 1학년 때 결혼하여 11녀를 낳았습니다.

 

이 소년이 바로 나의 아버지십니다.

아버지는 항상 자신에게 혹독하고 남에게 철저하셨습니다.

특히 자식에게는 두말이 필요없는 분이셨습니다.

 

"나는 아버지도 없이 혼자 벌어 어머니 공양해가며 대학까지 공부 했는데 너희들은 뭐하냐."

 

특히 술이라도 한잔 하시는 날에는 우리는 밤새 아버지 고생하신얘기, 가슴에 맺힌 얘기들을 듣느라 곤역을 치루었습니다.

그랬습니다. 날마다 같은 얘기를 반복하며 자신의 설움에 우시는 아버지 앞에서 우리는 조금씩 지쳐가고 있었습니다.

 

아버지는 성공하셨습니다.

국민이 한강의 기적을 이루던때에 아버지도 자신의 기적을 이루어 가셨습니다.

대기업에 입사하시어 승승장구 승진하셨고, 그때마다 목소리는 더커지셔서 우리는 아버지 앞에만 서면 주눅이 들어 갔습니다.

" 야 이자식들아 봐라, 나 우숩게 보던 놈들 다 나와라 , 가난하다고 나 놀리던 놈들 , 그래 나 도시락도 못싸가고

기차간에서 껌팔았다. 그래도 이놈들아 나 남들이 부러워하는 대학나오고 성공했다!"

 

바나나 하나 구경하기가 힘들던 시절 아버지는 귀한 과일이 나오면 제일 먼저 사오셧습니다.

"학교가서 남들이 바나나 얘기하면 기죽지 말아라. 파인힐 가서 징기스칸 고기 먹었다고 자랑해라."

 

아버지는 아버지의 열등감과 과시욕을 자식들이 채워주길 원하셨습니다. 공부도 1등 해야했고, 반장도 해야 했고,

그냥 뭐든지 아버지 친구 자식들 보다 나아야 했습니다.

아버지 생신 때 회사 직원들이나 친구분들이 집에 오시면 우리는 잘 교육받은 귀족의 자제들 처럼

예의 바른 모습으로 서 있어야 했습니다.

 

ㅇㅇ야 성적표 좀 가져와봐라...XX야 노래좀 해봐라... 우리애가 또 일등이잖아.글쎄,,,,얘는 그렇게 공부하지 말래도 참....

아마 머리가 비상한것같아...하하하...

 

우리는 인형처럼 웃고 ....그리고 노래하고....전교 일등처럼 행동 해야 했습니다. 아빠를 위해서...그분의 허풍을 위해서....

 

우리 남매가 아빠와 결정적으로 멀어지기 시작한것은 대학에 입학하고 부터인것 같습니다.

아버지가 무조건 대를 고집하셔서 오빠는 재수를 했지만 또한번 고배를 마시고 2차 대학에 입학했습니다.

 

아버지는 다시한번 삼수를 하라고 하셨지만 이미 지쳐버린 오빠의 고집을 꺽지 못했고 그 후 무섭게 저에게 집착하셨습니다.

그러나 솔직히 저는 자신이 없었습니다. 실력도 그랬고 이상하리만큼 시험 때만 되면 머리가 아팠습니다.

결국 고3 여름방학 예비고사를 3달 앞두고 저는 수술을 받았고 아버지가 원하시는 대학엔 원서도 못내보고 말았습니다.

 

"돈 그거다 소용없다. 평양에 있는 재산 무슨 소용있냐. 나봐라, 빈털털이로 나왔잖아 . 학벌, 내 머리속에 든게 최고야.

에구 이제 나는 다 망했다! 밥먹고 공부만 하라는데 그걸 못해. 못난것들....."

 

그렇게 아버지와 우리의 담은 높아만 갔습니다. 이후 아버지 입에서 자식 자랑은 사라졌고

우리 남매의 대학 졸업식 조차 아버지는 참석하지 않으셨습니다.

 

초등학교 졸업식에도 참석하시던 아버지셨는데...중학교 교복도 함께 맞추러 가시던 아버지였는데....

펑펑 소리내어 울지 못했기에 아직도 가슴에 상처로 남아 있었는지 모릅니다.

아버지의 자랑스런 딸이 되어 드리고 싶었는데.....

어쩌면 아버지의 실망하시는 모습을 보면서 그만큼 닿지 못하는 자신의 모습이 싫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결혼을 하고 ...자식을 낳고.....세월이 흐르고 .....

 

지난 주 어머니 학교는 저에게 큰 충격이었습니다.

 

"당신의 마음 속의 쓴 뿌리를 제거하십시오. 당신의 아버지를 용서하십시오."

 

한 주간 내내 내 마음속의 화두는 아버지와 용서 였습니다.

 

아버지 .......용서.....

 

한번도 아버지를 미워한다고 생각해 본적은 없습니다.

그러나 대학 입학 후 30여년의 세월이 지나도 아버지와 속 깊은 대화를 나누어 본적이 없다면,

항상 간단한 안부만 묻는것이 일상이었다면 ........입으로 아버지를 사랑한다는 고백을 할 수 없다면 ....

그것은 용서하지 못한것 아닐까요?

 

오늘 하루 아버지를 묵상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내 아버지.....살아온 세월이 아파서 많이 우셨던 아버지.

자신이 누리지 못한것을 자식에게 무조건 주고 싶어 하시던 아버지.

아무도 의지가 없어, 자랑거리가 없어 자식들을 자신의 울타리 삼고 싶어 하셨던 아버지 .

 

 

이제 제가 부모가 되어 아버지를 용서합니다.

 

낳으시고 기르시느라 수고하신죄를 .... 너무 많이 사랑하신 죄를 .....아버지가 못다이룬 꿈을 기대하신죄를 ..........